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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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아버지께서 주신 주황색 튜울립을 바라 보면서 토요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여름 내내 온갖 종류의 글라디올러스를 감상하면서 지냈는데,
가을이 되니 형형색색의 튜울립을 바라 보면서 지내게 되네요.
모두 다 꽃할아버지의 고우신 마음 덕분입니다.
꽃만 바라 보면 모든 시름이 다 사라지고,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꽃병에 물을 넣고 꽃을 정리하여 꽃병에 넣을 때마다,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안부를 묻게 됩니다.
들고 나온 꽃들이 모두 다 팔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꼬치꼬치 캐묻게 되나 봅니다.
아이가 토요마켓에서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기만 하면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달걀 장수 해리부터 내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둘째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꽃이 많이 팔렸다는 말 말고는 평소처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더군요.
물어보는 이야기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예전과 달리 아이의 행동에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종양의 크기를 줄이느라 하루에 두 번씩 배에 혼자 주사를 놓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주사를 놓은 후의 메스꺼움을 참느라 애쓰는 걸 지켜봐야 하기에 더 그럴 것입니다.
그 와중에 일요일 아침 성당 미사 때 피아노를 치는 걸 보면 대견하기도 하지만,
다른 환우들이 겪는 우울증이 아이에게도 올까봐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껏 아이는 잘 견뎌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베이킹도 자주 하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늘 웃으면서 쫑알쫑알 이야기도 잘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가 기운이 없어 보이고 말수도 적으니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얼마 전부터 배에 주사를 놓을 때마다 점점 더 통증이 커진다고 했는데다,
주사를 놓은 후 메스꺼운 증상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했었기에,
어쩌면 아이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외국에 살다 보니, 엄마로서 제대로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때도, 홀로 서는 연습만 시키면서 살았던 것 같군요.
늦둥이를 낳고도 모성애가 늘지 않았던 내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이를 셋 씩이나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모성애가 크지 않아서 더 그랬을지도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큰애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둘째가 다 큰 아이들인줄 알고,
생후 6개월도 채 못 된 막내까지 어린이 집에 맡기고 직장에 다녔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애는 늘 혼자서 병원에 다녀야했고,
어린이 집에 있는 둘째는 동생을 돌보면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유난히 조그마한 아이가 가방을 챙기기 귀찮아서 교과서들을 모두 책가방에 넣고 다녔는데도,
아이의 가방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살고 있는 동네에 초등학교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는데도,
입학하는 날 하루만 큰애와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막내가 18개월 때 모세기관지염으로 고생할 때도 직장에 나갔습니다.
참 지독하고 못된 엄마였습니다.
결국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었지만,
학원에 보내지 않아서 친구들과 사귈 기회를 그다지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자매가 함께 노는 시간이 참 많았지요.
유별나게 세 자매의 우애가 좋은 것은 셋이 참 많이 놀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둘째의 마음이 편치 않은 거 같아서 마음이 쓰였지만, 모른척하고 있었습니다.
큰애가 며칠 그냥 두고 보자고 했기에 큰애의 생각에 따르기로 했거든요.
자정이 되어 둘째 방으로 가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표정이 밝게 보였습니다.
다행으로 여기면서 살짝 모니터를 보니, 세 자매가 채팅을 하고 있더라고요.
웰링턴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막내와 옆 방의 언니와 함께 컴퓨터로 만나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항상 세 자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지내고 있었기에 늘 고마웠습니다.
오늘도 세 자매는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군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함께라는 것을 이제껏 바라 보면서 느끼고 있었는데,
잠시 잊고 둘째를 걱정했었던 거 같습니다.
둘째는 지금 성공적인 수술을 위하여 혼자 주사를 놓으면서 종양을 줄이고 있습니다.
종양을 줄이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인내를 가지고 매일매일 주사를 놓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아이지만, 때로는 힘들고 지치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잘 버텨나갈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늘 함께 하니까요.
" 이 병을 치유하는 힘은 나의 둘째딸 나경이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나경이의 몸상태는 스크린에 투영된 그림자같이 그녀가 사고하는 생활의 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크린의 그림을 바꾸기 위해서는 영화필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이제 영화필름이 되겠습니다.
나는 마음 속에 조화와 완전무결하게 건강한 모습을 투영합니다.
나경이의 몸과 그 전 기관(器官)을 창조한 무한의 치유력이 이제서야 비로소 그녀라는 존재의 모든 원자(原子)에 침투하여, 평화의 시냇물이 그녀의 육체의 각 세포를 통하여 흘러갑니다.
의사는 만능의 지혜에 인도되어 나경이에게 올바른 치료를 합니다.
병이라는 것은 궁극적 실재성은 없고, 부조화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과 생명의 무한한 원리와 손을 잡습니다.
이제는 조화와 건강과 평화가 나경이의 육체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고, 또 그렇게 되도록 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위 기도는 어떤 딸이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인데, 그 덕인지 엄마가 빠르게 회복을 하였다고 하더군요.
기도문이 마음에 들어 그 기도문을 인용하였습니다. 매일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이 기도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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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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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따나2님의 댓글
뉴지님, 둘째따님이 꼭 완쾌되어 힘차고 내일을 꿈꾸는 젊은이가 되길 간절히 바랄게요. 세자녀를 두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 아들만 하나입니다. 34살이구요. 전 대학졸업후 너무 어려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그 이듬해에 낳았습니다. 그후 유학을 왔고 솔직히 아이와 같이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학시절 너무 힘들어서 당연히 더이상 아이낳을 생각을 안했지만 원래부터 좀 이기적(?)이라서 아이가 많으면 제시간과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때 한 남자를 믿고 자식을 낳고 내 일생을 거기에 맞춰 계획한다는 일이 너무 위험부담이 클것 같다는 생각도 같이 했었습니다. 혹 살다가 안좋으면 아이 한명 정도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책임지고 잘 키울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히따나2님의 댓글
근데 살아보니 아이는 한명이나 세명이나 정성이 들어가는 걸로 치자면 결국 마찬가지더군요..한명이라고 힘이 안드는 것도 아니고 세명이라고 힘이 세배로 들어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이죠...공부끝내고 직장다니고 정신좀 차리고 여유가 약간 생기고 나니 아이역시 훌쩍 커서 대학간다고 집을 떠났죠...그래서 전 아이에게 미안함 마음이 많아요. 우리아이 역시 혼자큰거나 마찬가지죠. 엄마로서 다른 엄마들이 보통 아이들에게 해 주는 것을 전 못한 것 같기도 해요...아이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집에서 부모랑 같이 사는 동안에 본 엄마는 맨날 공부만 했으니(지금 아무 쓸모도 없는 공부 ㅋㅋ) 주부로서의 엄마는 보질 못하고...ㅋㅋ
히따나2님의 댓글
부모와 자식간의 행복은 그런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요즘은 문득 듭니다. 그리고 형제가 한명 정도 있었더라면 서로 의지하고 좋을텐데 하는 생각도 가끔 하구요..하지만 그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도저히 할수가 없었더랬습니다.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 모르기도 하지만 이젠 그 결정을 바꿀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부질없는 생각이기도 하지요...뉴지님의 세자매는 서로 의지하고 친구가 되어줄수 있으니 참 마음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전 아들이 형제 많은 집, 특히 딸만 있음 더 좋고, 그런 집에 사랑받는 데릴사위로 들어가 장모님에게 사랑 듬뿍받는 곳에 장가갔음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쪽 엄마아빠는 알아서 잘 살테니 신경쓰지 말고 장인장모와 처가식구들과 엎어져 좋아지내는 그런 장가말이죠...ㅋㅋㅋ 근데 정말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히따나2님의 댓글의 댓글
히따나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무아님께서 히따나님을 100% 믿으신다고 하시더니, 저 역시 100% 믿음이 가네요. 전 동갑 부부인데요,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4년을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동생이 먼저 시집을 가는바람에 결혼허락이 떨어졌는데, 그때 나이 30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째를 31에 낳았지요. 시작이 힘들어서 시련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를 셋씩이나 낳았으니..ㅎㅎㅎ 그래서 뉴질랜드로 와서 사나 봅니다. 아이들 중 하나라도 히따나님같은 시부모님을 만났으면 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히따나님.^^*
히따나2님의 댓글의 댓글
김밥 싸는 옆에서 입에 넣어주는 김밥 꼬다리를 넙죽넙죽 받아 먹는 사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김밥을 무척 빨리 말아요. 입이 짧은 큰애가 김밥 도시락만큼은 두배로 싸줘도 다 먹기에 김밥 도시락을 자주 싸준답니다. 내일도 김밥 싸달라고 하네요. 히따나님이 옆에 사신다면 김밥 만들어서 드릴텐데요.^^ 언제 뵐 날이 있겠지요. 글고 제 글을 이리도 아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읽으시면서 함께 공감을 해주시는 히따나님이 계셔서 얼마나 행복한지요? 늘 평안하시고요..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