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처럼 (222.♡.231.146)
2019년 12월 11일 오후 12:06 · 수정됨(12. 14. 23:26)
영생은 모든 사람, 아니 인류의 꿈이었다.
오래오래전 이집트의 파라오로 부터 진시황제에 이르기까지.
어디 이들 뿐이었겠습니까만...
양생술이니 방중술이니, 아름다워지기위해 늙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비술들이 결국은 죽지않기위해 하는 것이었음을.
하지만 정작 자기자신이 영생하는, 불사하는 존재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헛된 것을 꿈꾸며 살지를 않았을 텐데.
영생에대한 비밀은 자기자신을 먼저 아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보라고 하면 다들 우물 쭈물 합니다.
이것은 정작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는
반정이겠지요.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자기자신에 대해서 정의 내리지 못할까요?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자기'가 사실은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는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도데체 '누구'를 나라고 하는 걸까?
오래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각자가 알고있는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자기자신'에대해서 정의 내려 보라고.
대답들이 한결 같이 '나'는 이름이 최** 이며 몇년몇월몇일에 태어났으며 누구누구의
아들이며, 혹은 아버지, 혹은 엄마, 혹은 선생,혹은 어쩌구저쩌구 였습니다.
다들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맡은 역할에 대한 이야기만 열거 해놓을 뿐 정작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못하는 것이었습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모습이 어떻던지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잠시
맡고 있는 역할일 뿐입니다. 나 자신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맡고있는 그 배역이 '자기'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배역은 극작가가 쓴 대본에 맞게 그 역할을 수행할 배우에게 맡겨진 역할 일 뿐입니다.
영화가 끝나거나 연극의 막이 내려오면 끝나는 일회성입니다.
그런데 왜 다들 그 역할이 자기자신이라고 착각하며살아가는지...
공연이 끝이 나고 막이 내려오면 벗어 던져 버려야 하는 의상일 뿐인데...
내가 태어나기 전의 '나'
내게 이름이 주어지기전의'나'
내게 배역이 주어지기 전의 '나'
내가 맡은 배역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나'는 과연 무엇인지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도발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하늘도 흐릿하고 커피도 생각나는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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