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빠삐용작전 종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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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마당님의 댓글
홍천 들어와서 독도부터 만나서리 얘기를 나누었지요. 너 참 대단하다.. 내가 고마 졌다..그런데 한번은 더 조치를 취해 봐야 쓰것다. 아라찌?
아침부터 수시로 건네봐도 이 녀석 펜스안에 잘 있는것을 보면 이번 조치로 일지를 마감해도 될듯 싶은데요. 이제는 몇번 독도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해 너무 창피해서리,
빠삐용 독도와 관련된 사진과 글은 며칠 더 있다가 완전히 검증되면 올릴랍니다. 일분있으면 12시네요. 출석도장 찍고 잘랍니다.
아침부터 수시로 건네봐도 이 녀석 펜스안에 잘 있는것을 보면 이번 조치로 일지를 마감해도 될듯 싶은데요. 이제는 몇번 독도와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해 너무 창피해서리,
빠삐용 독도와 관련된 사진과 글은 며칠 더 있다가 완전히 검증되면 올릴랍니다. 일분있으면 12시네요. 출석도장 찍고 잘랍니다.
소리마당님의 댓글
오늘 창고확장공사 마치고 어스름 저녁에 뒤꼍의 불을 끄고 독도를 관찰했어요. 마지막 막음 조치를 취해놓은 어제 부터 오늘까지 얌전히 있는 독도를 몰래 숨어서 관찰해보았습니다. , 뒷마당 외등도 켜 가며 근 한시간 지켜보는동안 대략 30번은 탈출시도하더이다. 판단대로 출입문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왼쪽으로 몸을 튼것이 확실하였습니다. 이젠 미끄러운 판을 하나 더 대었으니 계속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간에 있는 빗장은 안에서 손을 밖으로 뻐처셔 열수 있도록 창살 하나를 제거해 놓았는데요. 이 녀석이 그 쪽으로 앞발이 쑥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하.. 빗장을 대충 질러놨을 경우에는 저렇게 해서 건들기만 해도 열릴 수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몇번 시도하고, 또 시도 하던 이 녀석이 급기야는 펜스 아래쪽 틈이 있는 곳에 주둥이를 쳐박고 밑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쪽 어둠속에서 저쪽 독도를 관찰하며 연민의 정도 나더이다. 우짜노...안타깝기도 하였습니다. 군에 있을 때 술 먹고 싶어 한 밤중에 월담하며 들랑거리던 생각도 나더이다. 어느 날엔 술이 많이 취했는지 남의 밭을 온통 밟고 지나왔는지, 다음 날 심하게 문책당한 기억도 나더이다. 지금 같으면 온 밭을 다 물어줘야 하지만 당시 최전방 시골 인심이 그리 사납지 않아 인사계님에게 된통 혼난것으로 마무리 되었어요.
아리는 독도의 그런 모습에 응원을 하는 것인지.. 나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인지 계속 뛰어다니고 쳐다보고 뛰어 다니고 또 쳐다보고..
십 여미터 떨어진 어둠속에서 지 쳐다보고 있는줄도 모르고 연신 계속되는 시도에 이젠 독도의 거친 숨소리까지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감시자의 눈으로, 호기심과,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 독도의 못 보던 모습을 혹! 기대하기도 하였어요.
문득... 독도를 보고 있는것이 아니라, 제 지나온 파란만장했던 모습을 보고 있더이다.
선린중학교는 제가 재수해서 들어간 학교입니다. 긴장한 날 , 수험표를 가지고 가지 않아 입장이 안 되었어요. 수험장 문앞에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너무 잘 챙겨놓은 수험표를 찾을 수 없었지요. 입장 마감시간이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고 울고 있던 아이를 응원나온 선생님께서 보고는 여차여차 해서 20분정도 늦게 입장이 허락되고..어쨋든 낙방을 하고 다시 재수를 하게 됩니다.
저희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학교때 한번은 가게 되는 수학여행을 저는 못 갈 정도였으니까요.
선린중을 거쳐 동 고등학교를 거치면 이 녀석이 그래도 은행원이라도 되어 집안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했던 부모님께 아주 충실한 아이였습니다. 공부도 그렁저렁 잘하고 재수해서 들어간 중학교 일학년때 주산반에 들며 주산자격 일급도 획득하며 당시 고등학교 3학년성적으로 전교 10등까지는 무시험으로 한국은행에 들어갈 때니, 모다 따논 당상이다라고 좋아했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랬습니다.
중3 여름방학 어느 저녁때, 형친구가 기타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다 문득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 기타치고 싶니? 배울래?' 이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 놓게 됩니다.
타향살이가 첫번째 배운 곡입니다. 타짱향 살짱이 레파미레라 짱짱.. 악보없이 이렇게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 형이 치는 해뜨는집- 아주 뿅 간곡입니다. 저거 한번 쳐 보고 싶다...파이프라인-뚜구뚜구뚜구뚜구.. 와우~!! 샹하이트위스트? -라도레레 라도레 미이미이 레도라솔랑좌라쟝쟝...사람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세광음악학원에서 나오는 이인성기타곡집인가? 하는 책을 사다가 모르는 것은 물어가며, 옆에서 훔쳐보고 몇가락 외워 쳐보기도하고..독학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상위성적이어서 고등학교는 그래도가볍게 들어갑니다. 아직 부모님은 모르고 계십니다. 아직 기대가 많이 있는 상태이지요.
1학년 상업부기? 그럭저럭 해 볼 만했습니다. 이제 기타는 제 특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놀러갈라치면 기타 치는 사람이 인기가 좋았고(회비 없었습니다)요, 그 보다는 야외전축 갖고 있으면 특별 대접을 받던 시절입니다. 가난한 놈은 또 그만그만 한 녀석들끼리 어울리니 어디를가든 기타들고 따라가게 됩니다.
고 2때 은행부기.. 이 때부터 슬슬 골치아파지기 시작하더니, 고 3때 공업부기는 아예 포기하고 성적도 최하위에서 왔다갔다하며 수업일수도 모자라 졸업을 하니 마니 하는 아주 못된 애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부모님께서 무언가 잘못되었도다!! 아신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런 저런 권유를 하지만 귀에 안 들어 옵니다. 오로지 기타.. 그리고 그룹싸운드를 만들고 합숙하며 집에는 한달에 한 두번 오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의정부, 동두천, 법원리, 송산, 춘천, 군산타운, 지금은 이름도 생각 안 나는 대구 가기전에 어디메.. 전라도만 빼고는 다 다니게 됩니다. 군에 가기전 마지막으로 있던곳이 대전 유성온천의 만년장호텔입니다.
이제 그만할란다... 기타특기를 감추고 쌩 보병으로 최전방에 떨어진 후ㅡ너무너무 군 생활이 고되 기타좀 친다고 얘기했더니 .. 이후 제대 전까지 기타 덕 많이 보았습니다. 기타 조금 치는 덕분에 이쁘게 보였는지 행정반으로 차출되며 행정을 배우게 됩니다. 이때 배운 챠트 실력으로 제대 후 교통부에 촉탁 필경사로 들어가게 되지요. 당시 5급 공무원 봉급 너무 작았습니다. 77년 9월에 4만7천원 이듬 해에 5만얼마 받게 되는데 저는 촉탁이니 연 200%밖에 안 나오는 상여금 그나마 없습니다. 당시 과장님이 상여금 지급하는 달에 최군이리와 수고 했다며 얼마씩 주시곤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아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이제 저 녀석이 사람도리를 하는구나..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나이가 많이 들어가는 언젠가..저는 알게 됩니다.
아직 첫 월급도 타지 못했는데, 어디서 빚을 내서 오셨는지 저에게 곤색 양복을 맞춰주시는 것입니다.
조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두도 사 신었습니다. 넥타이도 맬줄 알게 되었습니다. 촉탁이지만 공무원증에는 촉탁이란 표시가 없으니, 교통부라고 표시된 공무원증만 있으면, 버스는 안되도 열차같이 생긴것은 두 공짜입니다. 남산 해방촌에서 서울역 뒤쪽, 당시는 서부역이라고 하는 청사까지 걸어서 한시간여 걸렸지만 하나도 힘든 줄 몰랐더이다.
한명 두명 제대 하는 음악친구들이 불러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통금이 있던 시기에, 낮에는 교통부에서 밤에는 안양유원지 안에 있는 안양 나이트클럽에서 밴드질 하며 투잡을 하였습니다. 새벽엔 기차타고 서울집으로 와서 또 출근하고..
어느날 제주도 가자, 제주도 월급20만원 준다더라..20만원?? 공무원 봉급의 세배입니다. 몇번 고민하다가 제주도로 가게 됩니다. "오마니,, 저 대전으로 전근가게 되었어요" "기레 기러면 잘 있다 오라우"
요거이 우리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가 됩니다. 그리고 거짓 안부전화하고, 거짓 편지를 보냅니다. 월급은 우편환으로 바꿔 대전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대전 우체국에서 보내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제주도 20만원이 사기였습니다. 용량초과라네요.다음에 계속하지요.
이쪽 어둠속에서 저쪽 독도를 관찰하며 연민의 정도 나더이다. 우짜노...안타깝기도 하였습니다. 군에 있을 때 술 먹고 싶어 한 밤중에 월담하며 들랑거리던 생각도 나더이다. 어느 날엔 술이 많이 취했는지 남의 밭을 온통 밟고 지나왔는지, 다음 날 심하게 문책당한 기억도 나더이다. 지금 같으면 온 밭을 다 물어줘야 하지만 당시 최전방 시골 인심이 그리 사납지 않아 인사계님에게 된통 혼난것으로 마무리 되었어요.
아리는 독도의 그런 모습에 응원을 하는 것인지.. 나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인지 계속 뛰어다니고 쳐다보고 뛰어 다니고 또 쳐다보고..
십 여미터 떨어진 어둠속에서 지 쳐다보고 있는줄도 모르고 연신 계속되는 시도에 이젠 독도의 거친 숨소리까지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감시자의 눈으로, 호기심과,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 독도의 못 보던 모습을 혹! 기대하기도 하였어요.
문득... 독도를 보고 있는것이 아니라, 제 지나온 파란만장했던 모습을 보고 있더이다.
선린중학교는 제가 재수해서 들어간 학교입니다. 긴장한 날 , 수험표를 가지고 가지 않아 입장이 안 되었어요. 수험장 문앞에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너무 잘 챙겨놓은 수험표를 찾을 수 없었지요. 입장 마감시간이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고 울고 있던 아이를 응원나온 선생님께서 보고는 여차여차 해서 20분정도 늦게 입장이 허락되고..어쨋든 낙방을 하고 다시 재수를 하게 됩니다.
저희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학교때 한번은 가게 되는 수학여행을 저는 못 갈 정도였으니까요.
선린중을 거쳐 동 고등학교를 거치면 이 녀석이 그래도 은행원이라도 되어 집안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했던 부모님께 아주 충실한 아이였습니다. 공부도 그렁저렁 잘하고 재수해서 들어간 중학교 일학년때 주산반에 들며 주산자격 일급도 획득하며 당시 고등학교 3학년성적으로 전교 10등까지는 무시험으로 한국은행에 들어갈 때니, 모다 따논 당상이다라고 좋아했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랬습니다.
중3 여름방학 어느 저녁때, 형친구가 기타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다 문득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 기타치고 싶니? 배울래?' 이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 놓게 됩니다.
타향살이가 첫번째 배운 곡입니다. 타짱향 살짱이 레파미레라 짱짱.. 악보없이 이렇게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 형이 치는 해뜨는집- 아주 뿅 간곡입니다. 저거 한번 쳐 보고 싶다...파이프라인-뚜구뚜구뚜구뚜구.. 와우~!! 샹하이트위스트? -라도레레 라도레 미이미이 레도라솔랑좌라쟝쟝...사람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세광음악학원에서 나오는 이인성기타곡집인가? 하는 책을 사다가 모르는 것은 물어가며, 옆에서 훔쳐보고 몇가락 외워 쳐보기도하고..독학을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상위성적이어서 고등학교는 그래도가볍게 들어갑니다. 아직 부모님은 모르고 계십니다. 아직 기대가 많이 있는 상태이지요.
1학년 상업부기? 그럭저럭 해 볼 만했습니다. 이제 기타는 제 특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놀러갈라치면 기타 치는 사람이 인기가 좋았고(회비 없었습니다)요, 그 보다는 야외전축 갖고 있으면 특별 대접을 받던 시절입니다. 가난한 놈은 또 그만그만 한 녀석들끼리 어울리니 어디를가든 기타들고 따라가게 됩니다.
고 2때 은행부기.. 이 때부터 슬슬 골치아파지기 시작하더니, 고 3때 공업부기는 아예 포기하고 성적도 최하위에서 왔다갔다하며 수업일수도 모자라 졸업을 하니 마니 하는 아주 못된 애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부모님께서 무언가 잘못되었도다!! 아신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런 저런 권유를 하지만 귀에 안 들어 옵니다. 오로지 기타.. 그리고 그룹싸운드를 만들고 합숙하며 집에는 한달에 한 두번 오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의정부, 동두천, 법원리, 송산, 춘천, 군산타운, 지금은 이름도 생각 안 나는 대구 가기전에 어디메.. 전라도만 빼고는 다 다니게 됩니다. 군에 가기전 마지막으로 있던곳이 대전 유성온천의 만년장호텔입니다.
이제 그만할란다... 기타특기를 감추고 쌩 보병으로 최전방에 떨어진 후ㅡ너무너무 군 생활이 고되 기타좀 친다고 얘기했더니 .. 이후 제대 전까지 기타 덕 많이 보았습니다. 기타 조금 치는 덕분에 이쁘게 보였는지 행정반으로 차출되며 행정을 배우게 됩니다. 이때 배운 챠트 실력으로 제대 후 교통부에 촉탁 필경사로 들어가게 되지요. 당시 5급 공무원 봉급 너무 작았습니다. 77년 9월에 4만7천원 이듬 해에 5만얼마 받게 되는데 저는 촉탁이니 연 200%밖에 안 나오는 상여금 그나마 없습니다. 당시 과장님이 상여금 지급하는 달에 최군이리와 수고 했다며 얼마씩 주시곤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아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이제 저 녀석이 사람도리를 하는구나..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나이가 많이 들어가는 언젠가..저는 알게 됩니다.
아직 첫 월급도 타지 못했는데, 어디서 빚을 내서 오셨는지 저에게 곤색 양복을 맞춰주시는 것입니다.
조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두도 사 신었습니다. 넥타이도 맬줄 알게 되었습니다. 촉탁이지만 공무원증에는 촉탁이란 표시가 없으니, 교통부라고 표시된 공무원증만 있으면, 버스는 안되도 열차같이 생긴것은 두 공짜입니다. 남산 해방촌에서 서울역 뒤쪽, 당시는 서부역이라고 하는 청사까지 걸어서 한시간여 걸렸지만 하나도 힘든 줄 몰랐더이다.
한명 두명 제대 하는 음악친구들이 불러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통금이 있던 시기에, 낮에는 교통부에서 밤에는 안양유원지 안에 있는 안양 나이트클럽에서 밴드질 하며 투잡을 하였습니다. 새벽엔 기차타고 서울집으로 와서 또 출근하고..
어느날 제주도 가자, 제주도 월급20만원 준다더라..20만원?? 공무원 봉급의 세배입니다. 몇번 고민하다가 제주도로 가게 됩니다. "오마니,, 저 대전으로 전근가게 되었어요" "기레 기러면 잘 있다 오라우"
요거이 우리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가 됩니다. 그리고 거짓 안부전화하고, 거짓 편지를 보냅니다. 월급은 우편환으로 바꿔 대전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대전 우체국에서 보내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이 제주도 20만원이 사기였습니다. 용량초과라네요.다음에 계속하지요.
히따나2님의 댓글
소리마당님, 아침부터 제가 눈물바람입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감동해서요...너무 멋있으십니다. 살아온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쓰는 이나 읽는 이의 마음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소리마당님의 오늘은 그냥 있으신게 아니군요. 존경합니다. 저 역시 독도얘기를 읽으면서 독도야 왜 개로 태어났니 담 세상에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라..하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는데 다시 또 어찌 생각해보니 이 풍진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봐야 뭐 그리 좋은 거 있겠니 그냥 개로 태어나거나 걍 태어나지 말거라 하기도 했었습니다. 소리마당님의 음악은 (제 생각에는...들어보진 못했지만) 그래서 혼이 있을 것 같고 듣는 이에게 그것이 전달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그 젊은 날의 무모했던(?) 열정을 가진 또 다른 수많은 소리마당님들 덕분에 세상은 그나마 살만하고 힘들어도 다시 또 살아갈 이유를 찾고싶어지는게 아닐까요. 전 그래서 이방이 좋습니다. 장르도 다르고 음악수준도 다르지만 색깔 다른 멤버들이 어우러져 마치 잘 만들어진 오케스트라같은 생각이 들어서요...정말 효자셨네요. 하고싶은 걸 하시기는 했지만 부모님 생각을 참 많이 하셨던....그 인사가 마지막 인사였다니 정말 안타깝군요....드라마같은 얘기입니다..하긴 우리 모두가 드라마의 주인공들 아닐른지요...
무아님의 댓글
년배가 비슷하니 추억이 새롭습니다
저는 부산 미8군 하야리아 부대 관하 [시먼스 클럽] 이 프로 첫 무대였습니다
미국 우방 국가의 항구마다 있는 시먼스 클럽은 벙커 안에 레스토랑은 물론 빠찡꼬 까지 두루 있는.....
암튼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파티를 그곳에서 보았고
고추를 먹는 미쿡 할머니(로테이션 사장)를 보며 인간애를 느꼈습니다
딩연히 저의 음악적인 소양은 재즈쪽이 었으나 록으로 반항을 했습니다
선배님이 익히신 파이프, 샹하이, 해 뜨는집은 달달 외었지만
해 뜨는집의 기타 솔로는 27세에 겨우 완성하며 협연했습니다(벤춰스 버전)
국경의 남쪽(South of the border)이나 썰물(Ebb Tide)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곡들을 연주하며 지냈는데
지미나 에릭이나 제프도 저의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중 Funk 45 - 49 을 들으며 견문을 넓히고 결국엔
제임스 갱에서 이글스로 이적한 죠 월쉬(Joe Walsh)가 저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박통 사망무렵 저는 홍제동 고개에서 음악학원 기타선생으로 후배들에게 대학가요의 오리지널리티를
전수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세원과 우스갯소리 4회 공연 티킷을 팔러 왔죠 (엄청 시끄러움)
그후 사설학원 된소리와 무허가 강습소 철퇴로 문을 닫고
나이드신분은 아는 새샘트리오의 전항씨와 쉐그린의 전언수씨의 아버님(전 안드레)이 운영하시는
학원의 기타 파트를 맡게 되었는데
가톨릭 신자이신 이 분이 사람을 알아주며 감사를 일깨워준 분입니다
이만 총총 다음에.....
저는 부산 미8군 하야리아 부대 관하 [시먼스 클럽] 이 프로 첫 무대였습니다
미국 우방 국가의 항구마다 있는 시먼스 클럽은 벙커 안에 레스토랑은 물론 빠찡꼬 까지 두루 있는.....
암튼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파티를 그곳에서 보았고
고추를 먹는 미쿡 할머니(로테이션 사장)를 보며 인간애를 느꼈습니다
딩연히 저의 음악적인 소양은 재즈쪽이 었으나 록으로 반항을 했습니다
선배님이 익히신 파이프, 샹하이, 해 뜨는집은 달달 외었지만
해 뜨는집의 기타 솔로는 27세에 겨우 완성하며 협연했습니다(벤춰스 버전)
국경의 남쪽(South of the border)이나 썰물(Ebb Tide)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선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곡들을 연주하며 지냈는데
지미나 에릭이나 제프도 저의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중 Funk 45 - 49 을 들으며 견문을 넓히고 결국엔
제임스 갱에서 이글스로 이적한 죠 월쉬(Joe Walsh)가 저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박통 사망무렵 저는 홍제동 고개에서 음악학원 기타선생으로 후배들에게 대학가요의 오리지널리티를
전수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세원과 우스갯소리 4회 공연 티킷을 팔러 왔죠 (엄청 시끄러움)
그후 사설학원 된소리와 무허가 강습소 철퇴로 문을 닫고
나이드신분은 아는 새샘트리오의 전항씨와 쉐그린의 전언수씨의 아버님(전 안드레)이 운영하시는
학원의 기타 파트를 맡게 되었는데
가톨릭 신자이신 이 분이 사람을 알아주며 감사를 일깨워준 분입니다
이만 총총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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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피 119.♡.127.135
- 작성일
제주도 가기로 마음 먹으니 오직 그 생각뿐입니다. 마이가리라고 하지요-선불입니다. 100만원을 받아 앰프40만원 베이스키타 지금 생각 안나는 외제 - 휀다가 갖고 싶었는데 여비하고 셋방 얻으려면 돈이 부족했습니다. 근무하던 교통부 항공국 시설과장님께 사표를 제출합니다. "자네 올해만 참고 있게나 내년에 정식공무원으로 발령내주겠네" 이런 파격적이고 제게 과한 제의도 귀에 안들어옵니다.
당시엔 제주행 비행기는 작은 프로펠라 비행기였습니다. 창가에 앉아 밖을 쳐다보니 지금 허공에 있는데 프로펠러 두개 중 한개가 꺼지기도 해서 놀라기도 하고, 또 제트기류라고 하나 날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기도 하는 지금 생각하면 목숨 내걸고 타는 기분일텐데 , 어쨌든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처음 가보는 제주도 ..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월급 생각에 그저 들떠있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마중나온 이가 주민증을 달라고 합니다. ??? 지금에야 주민증대신 면허증도 통하고 바로바로 신원이 확인 되는 세상이지만 당시엔 민증이 없으면 배, 비행기 절대로 탈 수 없는 세상인것을 제주도 가서 알았습니다. 당시엔 왜 주민증을 회수하는지 몰랐습니다. 신원 확인차? 정도로 생각했어요.
관광나이트클럽-과연 어떤 무대일까?
공항에서 신제주로 이동하는 몇십분동안 상쾌한 바다바람과 그리고 비릿한 냄새, 군데군데 보이는 오름들을 구경하며, 잔뜩 궁굼해 하던 기대는 클럽앞에 하차하며 산산히 부서집니다. 서울로 치면 그냥 맥주집입니다. 아가씨 있는 맥주집^^--어르신들은 일본말로 삐루집이라고도 했습니다. 기지촌으로 치면 그냥 작은 클럽에 불과한 것이 관광나이트클럽이라고 떠!~하니 써있습니다.
제주도는 통금이 없으니 술집은 몽땅 나이트클럽이 되는것을 현지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음악요?
무아선생님이 즐기셨다는 James Gang이 연주한 Funk#49 - 이곡 한번도 연주 못해봤습니다.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이것에 맞춰 춤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제가 월금20만원에 혹해서 선금 100만원 받고, 제주도에 가서 이노꼬리 당한 없소가 바로 오브리빵 술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노꼬리란 말 아시죠-억류된 딴따라가 되었습니다. 선불로 받은 100만원은 100일 일수로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제주도에서는 말이 됩니다. 제주도에 말이 많아서인가봅니다.
100만원을 백일일수로 빌리려면 한달이자 10%*석달=30%, 즉 30만원을 먼저 공제하고 70만원만 받고서는 백일동안 매일 만원씩 갚아 나가야 하는데요.. 저는 이자를 선공제 안 했으니 30만원을 원금에 부쳐서 130만원을 매일 만삼천원씩 갚아 나가야 한다는 이상한 계산법에, 그리고 이제 어쩔래? 하고 쳐다보는 조폭 아저씨 앞에서 무언가 잘못되얐다.. 잘못왔구나!! 알게 됩니다.
다 갚은 것이 거의 일년이 다 되가는 여름입니다.
초 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일요일도 없이 뽕짝 반주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월급 20만원은 잘 받았을까 궁굼해 하실것 같습니다. 제주도 계산법에 의하면 매일 만원 정도는 버니까 대략 30만원인데 공 치는날 감안하여 20만원정도는 수입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한술 더 떠서 제주도 일수는 세개를 연속해서 못 찍으면 한개가 추가 되는 이상한 일수놀이인데요.. 저 한테는 그것은 봐주겠다고 선심성 발언을 하는 주인에게 항의는 커녕 감사하다고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제주도였습니다.
빚을 다 갚을즈음 서울에서 소식이 옵니다. 군 가기전 멤버중 마지막 주자가 제대를 한것이지요. 다시 뭉치자고 어서 올라 오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빚도 다 갚았으니 올라갈 참이라 주인에게 의사를 밝힙니다.
"절대 안돼"????????????
제가요, 주인장의 조카되고 그 업소에서 카운타 보는 아가씨하고 사귀었는데요. 이 여자가 계를 들어 벌써 곗돈은 타 갔다.. 자네가 서울가면 이 아이가 분명 따라 갈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곗돈을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된다!! 라는 얘기입니다. 말이 안되지요? 제주도에서는 조폭들이 내 뱉는 말은 모두 다 말이 됩니다.
결국 선불받아 산 앰프와, 베이스기타,,, 몽땅 다 털어주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제대한 친구들이 모두 만나니 또 다 잊을 수 있습니다.
몇달간 합숙한 후, 다시 동두천,인천, 그리고 이태원에 정착합니다. 킹클럽 세븐클럽 킴스클럽... 이때가 음악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일반으로 진출해서 명동 마이하우스 클럽에서 연주하다, 불황이라는 어느 해 여름 사랑과평화에게 밀려나서는 , 종로3가 앉은 고고 술집으로 가게 됩니다. 앉은 고고 아시죠? 허가사항에 무도장을 설치해야하는 여건은 안되고, 음악은 나오는데.. 앉아서 흔들어대는 소주도 맥주도 파는 허름한 클럽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훈이가 왔다고 뉘가 전해 줍니다. 김훈이가 누구야? 가요곡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던때라 당시,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불러 십대 가수왕에 까지 오른 김훈씨를 저희 멤버들이 알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온 나라가 디스코열풍에 휩싸여 있을 때, 오로지 락앤롤만 고집하던 저희팀을 수소문해서 왔다나 어쨌다나..
계약을 하자고 합니다. 이제 부터는 '김훈과 트리퍼즈'란 팀 명을 갖게되었습니다. 매일 찌질이 궁상만 떨던 저희 팀이 어느 날, 훗날 키스그룹이 신던 앞굽15센티 뒷굽20센티 구두를 맞춰신고, 판타롱 바지로 쫙 내려서 가리고, 허리에는 실크로 띠를 만들어 두르고 폼나는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래야 되는구나...요즘 흔한 말로 물이 틀려졌습니다. 계약한 내용중에 일년치 페이로 악기와 제반필요한 것을 먼저 사용 한다가 있는데요. 의상은 이미 말씀드렸고, 드럼-루딕으로 바꿉니다. 기타-휀다로 바꿉니다. 건반-야마하 스트링으로 바꿉니다. 베이스-뮤직맨으로 할까 휀다로 할까? 고민 많이 하다 당시 제가 결혼준비중이라 돈이 필요해서 바꾸지 않게 됩니다.
음악생활 중 개인에게 지급하는 돈을 처음 받아보게 됩니다. 생활은 많이 풍요로와 졌으나 음악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김훈이 형은 참으로 좋은 분이었으나, 저는 모든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것이 확실합니다.
일년 후, 저는 탈퇴해서 새로운 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명품베이스기타 - Ricken Baker를 구입했습니다. 정말 소리 좋더이다.
강릉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중 첫째 아이의 백일을 맞게 됩니다.
단체숙소에서 맥주 몇병,,케잌하나,,그리고 마른안주 등등..연주도중 아이를 안고 찾아온 아내를 달래며
, 연주끝내고 새벽 숙소에 와서 멤버들과 함께 치루는 백일잔치..참으로 초라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일까요? 이건 아니야! 불현듯 스친 생각이 또 제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나 이제 음악 그만할란다 - 멤버들에게 통보하고 다음 날 사장에게 통보하고, 다른 팀 올때까지 십여일 더 연주하고는 다 정리하였습니다. 앰프팔고 베이스 처분하고 무작정 형이 소개한 직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용량초과랍니다. 다음에 또 올리지요.
당시엔 제주행 비행기는 작은 프로펠라 비행기였습니다. 창가에 앉아 밖을 쳐다보니 지금 허공에 있는데 프로펠러 두개 중 한개가 꺼지기도 해서 놀라기도 하고, 또 제트기류라고 하나 날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기도 하는 지금 생각하면 목숨 내걸고 타는 기분일텐데 , 어쨌든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처음 가보는 제주도 ..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월급 생각에 그저 들떠있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마중나온 이가 주민증을 달라고 합니다. ??? 지금에야 주민증대신 면허증도 통하고 바로바로 신원이 확인 되는 세상이지만 당시엔 민증이 없으면 배, 비행기 절대로 탈 수 없는 세상인것을 제주도 가서 알았습니다. 당시엔 왜 주민증을 회수하는지 몰랐습니다. 신원 확인차? 정도로 생각했어요.
관광나이트클럽-과연 어떤 무대일까?
공항에서 신제주로 이동하는 몇십분동안 상쾌한 바다바람과 그리고 비릿한 냄새, 군데군데 보이는 오름들을 구경하며, 잔뜩 궁굼해 하던 기대는 클럽앞에 하차하며 산산히 부서집니다. 서울로 치면 그냥 맥주집입니다. 아가씨 있는 맥주집^^--어르신들은 일본말로 삐루집이라고도 했습니다. 기지촌으로 치면 그냥 작은 클럽에 불과한 것이 관광나이트클럽이라고 떠!~하니 써있습니다.
제주도는 통금이 없으니 술집은 몽땅 나이트클럽이 되는것을 현지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음악요?
무아선생님이 즐기셨다는 James Gang이 연주한 Funk#49 - 이곡 한번도 연주 못해봤습니다. 들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이것에 맞춰 춤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제가 월금20만원에 혹해서 선금 100만원 받고, 제주도에 가서 이노꼬리 당한 없소가 바로 오브리빵 술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노꼬리란 말 아시죠-억류된 딴따라가 되었습니다. 선불로 받은 100만원은 100일 일수로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제주도에서는 말이 됩니다. 제주도에 말이 많아서인가봅니다.
100만원을 백일일수로 빌리려면 한달이자 10%*석달=30%, 즉 30만원을 먼저 공제하고 70만원만 받고서는 백일동안 매일 만원씩 갚아 나가야 하는데요.. 저는 이자를 선공제 안 했으니 30만원을 원금에 부쳐서 130만원을 매일 만삼천원씩 갚아 나가야 한다는 이상한 계산법에, 그리고 이제 어쩔래? 하고 쳐다보는 조폭 아저씨 앞에서 무언가 잘못되얐다.. 잘못왔구나!! 알게 됩니다.
다 갚은 것이 거의 일년이 다 되가는 여름입니다.
초 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일요일도 없이 뽕짝 반주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월급 20만원은 잘 받았을까 궁굼해 하실것 같습니다. 제주도 계산법에 의하면 매일 만원 정도는 버니까 대략 30만원인데 공 치는날 감안하여 20만원정도는 수입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한술 더 떠서 제주도 일수는 세개를 연속해서 못 찍으면 한개가 추가 되는 이상한 일수놀이인데요.. 저 한테는 그것은 봐주겠다고 선심성 발언을 하는 주인에게 항의는 커녕 감사하다고라고 얘기할 수 밖에 없는 제주도였습니다.
빚을 다 갚을즈음 서울에서 소식이 옵니다. 군 가기전 멤버중 마지막 주자가 제대를 한것이지요. 다시 뭉치자고 어서 올라 오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빚도 다 갚았으니 올라갈 참이라 주인에게 의사를 밝힙니다.
"절대 안돼"????????????
제가요, 주인장의 조카되고 그 업소에서 카운타 보는 아가씨하고 사귀었는데요. 이 여자가 계를 들어 벌써 곗돈은 타 갔다.. 자네가 서울가면 이 아이가 분명 따라 갈것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곗돈을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된다!! 라는 얘기입니다. 말이 안되지요? 제주도에서는 조폭들이 내 뱉는 말은 모두 다 말이 됩니다.
결국 선불받아 산 앰프와, 베이스기타,,, 몽땅 다 털어주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제대한 친구들이 모두 만나니 또 다 잊을 수 있습니다.
몇달간 합숙한 후, 다시 동두천,인천, 그리고 이태원에 정착합니다. 킹클럽 세븐클럽 킴스클럽... 이때가 음악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일반으로 진출해서 명동 마이하우스 클럽에서 연주하다, 불황이라는 어느 해 여름 사랑과평화에게 밀려나서는 , 종로3가 앉은 고고 술집으로 가게 됩니다. 앉은 고고 아시죠? 허가사항에 무도장을 설치해야하는 여건은 안되고, 음악은 나오는데.. 앉아서 흔들어대는 소주도 맥주도 파는 허름한 클럽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훈이가 왔다고 뉘가 전해 줍니다. 김훈이가 누구야? 가요곡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던때라 당시,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불러 십대 가수왕에 까지 오른 김훈씨를 저희 멤버들이 알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온 나라가 디스코열풍에 휩싸여 있을 때, 오로지 락앤롤만 고집하던 저희팀을 수소문해서 왔다나 어쨌다나..
계약을 하자고 합니다. 이제 부터는 '김훈과 트리퍼즈'란 팀 명을 갖게되었습니다. 매일 찌질이 궁상만 떨던 저희 팀이 어느 날, 훗날 키스그룹이 신던 앞굽15센티 뒷굽20센티 구두를 맞춰신고, 판타롱 바지로 쫙 내려서 가리고, 허리에는 실크로 띠를 만들어 두르고 폼나는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래야 되는구나...요즘 흔한 말로 물이 틀려졌습니다. 계약한 내용중에 일년치 페이로 악기와 제반필요한 것을 먼저 사용 한다가 있는데요. 의상은 이미 말씀드렸고, 드럼-루딕으로 바꿉니다. 기타-휀다로 바꿉니다. 건반-야마하 스트링으로 바꿉니다. 베이스-뮤직맨으로 할까 휀다로 할까? 고민 많이 하다 당시 제가 결혼준비중이라 돈이 필요해서 바꾸지 않게 됩니다.
음악생활 중 개인에게 지급하는 돈을 처음 받아보게 됩니다. 생활은 많이 풍요로와 졌으나 음악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김훈이 형은 참으로 좋은 분이었으나, 저는 모든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것이 확실합니다.
일년 후, 저는 탈퇴해서 새로운 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명품베이스기타 - Ricken Baker를 구입했습니다. 정말 소리 좋더이다.
강릉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중 첫째 아이의 백일을 맞게 됩니다.
단체숙소에서 맥주 몇병,,케잌하나,,그리고 마른안주 등등..연주도중 아이를 안고 찾아온 아내를 달래며
, 연주끝내고 새벽 숙소에 와서 멤버들과 함께 치루는 백일잔치..참으로 초라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일까요? 이건 아니야! 불현듯 스친 생각이 또 제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나 이제 음악 그만할란다 - 멤버들에게 통보하고 다음 날 사장에게 통보하고, 다른 팀 올때까지 십여일 더 연주하고는 다 정리하였습니다. 앰프팔고 베이스 처분하고 무작정 형이 소개한 직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용량초과랍니다. 다음에 또 올리지요.
무아님의 댓글
트리퍼즈로 활동 하셨군요~~
저는 보컬 그룹 사운드는 34살 까지 올바른 팀도 못꾸리고
좋은 팀에 들어 가보지도 못한 채 고생만 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진주로 다시 부산 > 제주도 챔피언 나이트클럽(이 안사노씨 운영) 갈 기회도 놓치고
변두리 미드나이트로 전전 하다가 상경
스타트가 청량리 맘모스 ㅡㅡ> 청록회관 ㅡㅡ> 황궁 ㅡㅡ>코리아타운 ㅡㅡ>
크로바 호떼루 ㅡㅡ> 두루두루 풀밴드 세션으로 마감 했쉽니다 (참으로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오브리 빵도 당연 거쳤죠
무아의 밤무대 야사 제비? 참새? 편을 한번 읽어주시면 합니다
아래 검색란에 제비치면 나옵니다
저는 보컬 그룹 사운드는 34살 까지 올바른 팀도 못꾸리고
좋은 팀에 들어 가보지도 못한 채 고생만 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진주로 다시 부산 > 제주도 챔피언 나이트클럽(이 안사노씨 운영) 갈 기회도 놓치고
변두리 미드나이트로 전전 하다가 상경
스타트가 청량리 맘모스 ㅡㅡ> 청록회관 ㅡㅡ> 황궁 ㅡㅡ>코리아타운 ㅡㅡ>
크로바 호떼루 ㅡㅡ> 두루두루 풀밴드 세션으로 마감 했쉽니다 (참으로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오브리 빵도 당연 거쳤죠
무아의 밤무대 야사 제비? 참새? 편을 한번 읽어주시면 합니다
아래 검색란에 제비치면 나옵니다
소리마당님의 댓글
글을 쓰다 보니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보통 카페나 단체 홈피에서 매일 도배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저도 혹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잠간 생각해 봅니다.
어쨌든 독도와 어둠속에서 교감했던 그 느낌-꿈에서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속, 그 짧은 찰나에 살아온 과거가 다 생각났다라는 경험 갖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주로 좋은 경험보다는 잘 못 살아온 것들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 주마등처럼 이어지던 그 어둠속 회한이 아직 남아 있어 더 쓸랍니다.
직장이래야 작은 소규모 회사였습니다. 여직원 2, 남직원2, 사장님 그리고 제가 신입사원입니다.
월급은 10만원. 81년도에 10만원은 공장에서 재봉질하는 여공의 수준입니다. 일반 사무 여직원이 15만원, 남직원 18만원 대리급이 20만원 정도로 기억합니다.
교통부 촉탁직 빼고는 사회의 첫 경험인 직장에서 열심히 일 했습니다. 당시는 아직 강남이 개발 되려는 때라 모든 무역회사들이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소공동 그리고 서소문까지 몰려 있던 때입니다. 직장은 신당동 한양고등학교 옆에 있었습니다. 당시 버스가 120원으로 기억하는데요.. 아침 출석도장을 찍고는 코스를 잡아 나서게 됩니다. 몽땅 걸어 다녔습니다. 한 거래처에서 다른 거래처로 이동하는데 버스요금 120원은 인정해 주고 있으니 열군데 거래처를 들른다면 1,200원은 챙길 수 있었고 그것으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남대문시장 지게골목이라고 있습니다. 지게짐 지는 사람들이 일거리가 나오기를 대기하는 골목을 뜻합니다. 이 곳에 가면 순대국이 500원 하는 곳이 있습니다. 물론 등짐을 지고 하루를 고되게 살아가는 이들을 겨냥하여 싸고도 많이 주는 곳입니다. 뚝배기에 곱배기로 넘치도록 주는 곳입니다. 지금도 저는 순대국 참 좋아합니다. 먹을 때 마다 당시의 제 모습을 떠올리지요.
신당동에서 출발하여 세운상가에 있는 거래처, 그리고 충무로, 그리고 명동에 이르면 얼추 점심시간이 됩니다. 영업사원이니까 으례 거래처 접대를 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당시 견본 또는 발주서등만 주거나 받는 아주 간단한 일을 하는 생초보 영업사원이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오늘 밥 좀 사고가지' 하는 농담조차 없으니 따로 회사돈 가지고 접대라고 할 수도 없는 얼떨떨한 직원이었어요. 명동에서 급하게 이동해서 남대문 지게골목으로 가면 점심시간입니다. 허름한 차림에 다들 소주한병씩 반주를 곁들여 먹어 불콰해진 얼굴 사이로 양복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으니.. 참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장면이었겠다 생각합니다.
다시 명동으로 가서 마지막 몇 군데 더 돌고 이제 시청뒤쪽으로 이동합니다. 소공동에도 무역회사들이 밀집해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서소문으로 이동하여 중앙일보사 정도까지 가면 하루 일과가 끝나게 되지요.
석달이 되는 월급날, 사장님께서 오늘 퇴근 후 술 한잔 하자고 하십니다. ???
술집에서 저에게 월급 20만원을 주십니다. 그 동안은 테스트 기간이었다고... 그리고 그동안 10만원은 형님이 대신 내주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펑펑 울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영어 나부랑이 발음만 듣고 이해하던 것들, 실제 서류상 수출입관련 서류들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당시 너무나 난무하던 영어로 된 업무용 낱말들을 익히게 되지요.
일하는 동안 , 수 없이 - 과거 태만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처절한 응징을 받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한점 양보 안 해주는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삼 년 정도 된 해일까요? 거래처 뉘가 저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동안 지켜보았다나 우쨌다나...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돈 앞에 저를 키워 준 사장님을 속이고 밑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사회에 나와 첫 직장에서, 처음으로 저를 알아 준 우리 사장님을 배신하게 되며 독립을 하게 됩니다.
작은 서브로컬업체의 사장이 되어 음악생활이 아닌 사회인으로 처음으로 자존감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시켜주었던 식구들에게 이제사 떳떳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월세에서 전세로 거처를 옮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연탄부뚜막 난방집에서 보일러 난방집으로 옮기던 날 하늘은 참 맑아 보였습니다.
개스레인지 그리고 칼라티비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더 열심히 다닙니다.- 알렐루야~~~십일조 제대로 내기 시작합니다. 꾹꾹 눌러 넘치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더군요. 의도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소량의 제품불량이 발견되며, 선적직전 검사과정에서 바이어측 검사원과 수출업체측 직원과 사소한 말다툼이 자존심 대결로 이어지며 그해 납품 물량 전체가 결제보류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결국은 우선은 선적하기로 하되, 본 제품이 매장에서 작년 수준으로 하자없이 팔렸을 때 물품대금을 지급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데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여 후, 결재금액을 어음 한장으로, 그것도 6개월짜리로 받게됩니다.
다시 그 어음은 저에게 투자했던 분에게 돌아가고 다시 저는 빈털터리가 되지요.
너무 순진해서인가요? 순진하다는 것이 이젠 그럲게 좋게 해석되지 않는 나이가 되었으나, 당시에는 그래야만 했던것 같습니다. 투자자의 담보 다 빼 주고, 돈도 돌려주고 거지가 된 저를, 사방에서 비웃고 있습니다. 발 뻗을곳은 남겨 놔야 하는데....걱정은 해 주지만 뒤에서는 똑똑한 바보라고 하더군요.
글쎄요..서른넷의 나이에 아직 세상의 쓰라림을 덜 겪어서일까요? 삼년간 운영하는 동안 내내 떠나지 않았던 죄책감-나를 믿어 준 이를 배신했다는 것에 항시 미안해 했고,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시 취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동종업계에서는 취직이 안되더이다. 아마도 사장을 배신한 이력이 따라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둘째 아이가 태어난 해 인데요 급기야는 전세에서 월세로 추락하게 되지요.
우여곡절 끝에 지방에 일자리가 생기며 저 혼자 내려가게 됩니다. 그 이후 몇 년간 참 고생 마이 했습니다. 지금은 남이 된 전 처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고 큰 아이는 제가, 둘째는 아기엄마가 데리고 친정으로 가며 주말 부부가 되었어요.
배신했던 사장님께서 다시 오라고 불러 주었지만, 절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냥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던 어느 날 , 제 월급을 대신 내 주었던 형이 시장에서 원사도매 가게를 차리며, 사무실을 같이 쓰자고 제의해 옵니다. 당시 다시 재기하겠노라고 서울로 와서 다른 사람의 사무실에 빌 붙어서 제 명의로 사업자를 갖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임대료라도 아끼라는 제의였습니다.
이 계기가 제 인생을 또 바꾸게 됩니다.
용량초과라고 합니다. 다음에 또 올리지요
어쨌든 독도와 어둠속에서 교감했던 그 느낌-꿈에서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속, 그 짧은 찰나에 살아온 과거가 다 생각났다라는 경험 갖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주로 좋은 경험보다는 잘 못 살아온 것들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 주마등처럼 이어지던 그 어둠속 회한이 아직 남아 있어 더 쓸랍니다.
직장이래야 작은 소규모 회사였습니다. 여직원 2, 남직원2, 사장님 그리고 제가 신입사원입니다.
월급은 10만원. 81년도에 10만원은 공장에서 재봉질하는 여공의 수준입니다. 일반 사무 여직원이 15만원, 남직원 18만원 대리급이 20만원 정도로 기억합니다.
교통부 촉탁직 빼고는 사회의 첫 경험인 직장에서 열심히 일 했습니다. 당시는 아직 강남이 개발 되려는 때라 모든 무역회사들이 충무로와 명동 그리고 소공동 그리고 서소문까지 몰려 있던 때입니다. 직장은 신당동 한양고등학교 옆에 있었습니다. 당시 버스가 120원으로 기억하는데요.. 아침 출석도장을 찍고는 코스를 잡아 나서게 됩니다. 몽땅 걸어 다녔습니다. 한 거래처에서 다른 거래처로 이동하는데 버스요금 120원은 인정해 주고 있으니 열군데 거래처를 들른다면 1,200원은 챙길 수 있었고 그것으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남대문시장 지게골목이라고 있습니다. 지게짐 지는 사람들이 일거리가 나오기를 대기하는 골목을 뜻합니다. 이 곳에 가면 순대국이 500원 하는 곳이 있습니다. 물론 등짐을 지고 하루를 고되게 살아가는 이들을 겨냥하여 싸고도 많이 주는 곳입니다. 뚝배기에 곱배기로 넘치도록 주는 곳입니다. 지금도 저는 순대국 참 좋아합니다. 먹을 때 마다 당시의 제 모습을 떠올리지요.
신당동에서 출발하여 세운상가에 있는 거래처, 그리고 충무로, 그리고 명동에 이르면 얼추 점심시간이 됩니다. 영업사원이니까 으례 거래처 접대를 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당시 견본 또는 발주서등만 주거나 받는 아주 간단한 일을 하는 생초보 영업사원이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오늘 밥 좀 사고가지' 하는 농담조차 없으니 따로 회사돈 가지고 접대라고 할 수도 없는 얼떨떨한 직원이었어요. 명동에서 급하게 이동해서 남대문 지게골목으로 가면 점심시간입니다. 허름한 차림에 다들 소주한병씩 반주를 곁들여 먹어 불콰해진 얼굴 사이로 양복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으니.. 참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장면이었겠다 생각합니다.
다시 명동으로 가서 마지막 몇 군데 더 돌고 이제 시청뒤쪽으로 이동합니다. 소공동에도 무역회사들이 밀집해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서소문으로 이동하여 중앙일보사 정도까지 가면 하루 일과가 끝나게 되지요.
석달이 되는 월급날, 사장님께서 오늘 퇴근 후 술 한잔 하자고 하십니다. ???
술집에서 저에게 월급 20만원을 주십니다. 그 동안은 테스트 기간이었다고... 그리고 그동안 10만원은 형님이 대신 내주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펑펑 울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영어 나부랑이 발음만 듣고 이해하던 것들, 실제 서류상 수출입관련 서류들을 읽을 수 있게 되고... 당시 너무나 난무하던 영어로 된 업무용 낱말들을 익히게 되지요.
일하는 동안 , 수 없이 - 과거 태만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처절한 응징을 받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한점 양보 안 해주는 사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삼 년 정도 된 해일까요? 거래처 뉘가 저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동안 지켜보았다나 우쨌다나...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돈 앞에 저를 키워 준 사장님을 속이고 밑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사회에 나와 첫 직장에서, 처음으로 저를 알아 준 우리 사장님을 배신하게 되며 독립을 하게 됩니다.
작은 서브로컬업체의 사장이 되어 음악생활이 아닌 사회인으로 처음으로 자존감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시켜주었던 식구들에게 이제사 떳떳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월세에서 전세로 거처를 옮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연탄부뚜막 난방집에서 보일러 난방집으로 옮기던 날 하늘은 참 맑아 보였습니다.
개스레인지 그리고 칼라티비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더 열심히 다닙니다.- 알렐루야~~~십일조 제대로 내기 시작합니다. 꾹꾹 눌러 넘치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녹치 않더군요. 의도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소량의 제품불량이 발견되며, 선적직전 검사과정에서 바이어측 검사원과 수출업체측 직원과 사소한 말다툼이 자존심 대결로 이어지며 그해 납품 물량 전체가 결제보류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결국은 우선은 선적하기로 하되, 본 제품이 매장에서 작년 수준으로 하자없이 팔렸을 때 물품대금을 지급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데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8개월 여 후, 결재금액을 어음 한장으로, 그것도 6개월짜리로 받게됩니다.
다시 그 어음은 저에게 투자했던 분에게 돌아가고 다시 저는 빈털터리가 되지요.
너무 순진해서인가요? 순진하다는 것이 이젠 그럲게 좋게 해석되지 않는 나이가 되었으나, 당시에는 그래야만 했던것 같습니다. 투자자의 담보 다 빼 주고, 돈도 돌려주고 거지가 된 저를, 사방에서 비웃고 있습니다. 발 뻗을곳은 남겨 놔야 하는데....걱정은 해 주지만 뒤에서는 똑똑한 바보라고 하더군요.
글쎄요..서른넷의 나이에 아직 세상의 쓰라림을 덜 겪어서일까요? 삼년간 운영하는 동안 내내 떠나지 않았던 죄책감-나를 믿어 준 이를 배신했다는 것에 항시 미안해 했고,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시 취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동종업계에서는 취직이 안되더이다. 아마도 사장을 배신한 이력이 따라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둘째 아이가 태어난 해 인데요 급기야는 전세에서 월세로 추락하게 되지요.
우여곡절 끝에 지방에 일자리가 생기며 저 혼자 내려가게 됩니다. 그 이후 몇 년간 참 고생 마이 했습니다. 지금은 남이 된 전 처는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고 큰 아이는 제가, 둘째는 아기엄마가 데리고 친정으로 가며 주말 부부가 되었어요.
배신했던 사장님께서 다시 오라고 불러 주었지만, 절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냥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던 어느 날 , 제 월급을 대신 내 주었던 형이 시장에서 원사도매 가게를 차리며, 사무실을 같이 쓰자고 제의해 옵니다. 당시 다시 재기하겠노라고 서울로 와서 다른 사람의 사무실에 빌 붙어서 제 명의로 사업자를 갖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임대료라도 아끼라는 제의였습니다.
이 계기가 제 인생을 또 바꾸게 됩니다.
용량초과라고 합니다. 다음에 또 올리지요
소리마당님의 댓글
낮에 홍천에 들어와 지금 혼자 있습니다. 아니 밖에는 펜션에 오신 손님들이 놀고 있으니 혼자는 아니군요. 방금 집사람과 늦동이 둘이서 미국여행을 갔어요. 뉴욕 워싱톤 뉴저지 쪽이라고 하는데 저는 안 가 봤으니 잘 모릅니다. 2주동안 잘 보고 많이 배우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늦동이가 아직 어렸을 적에 지금과 같이 둘만 호주로 여행 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인도로 가고싶으니 나중에 혼자 가겠다고 한것이 지금껏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가지 못한것이 아니라 가지 못하게 하는 집사람때문입니다. 제가 역마살이 있어서 가면 안 온다나 우쨌다나.. 이유는 그거 하나입니다. 뉘랑 같이 가면 보내주겠다고 하는데..아직 그 짝을 몬 만났습니다. 인도로 해서 티벳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달랑 하나입니다. 다녀온 제자의 말인즉슨, 사람 사는 냄새가 아주 재미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고 싶지 않더랍니다. 히피족이 인도의 사상을 흉내낸 이들이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저 막연히 그곳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것이죠.
어쨋든 시작한 얘기거리 마칠라고 합니다. 너무 지루한것 같아 짧게 끝낼랍니다.
시장 도매라는 것이 일반인들은 잘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정식으로 내 비춰진 시장이 아니라 음지에서 거래하는 시장이지요. 겉으로 보기엔 가로세로 2미터 * 2미터 의 작은 점포같은 칸막이 사무실에, 책상하나와 추가 인테리어 없고, 견본 몇개 걸려있으며, 달랑 전화 두어대 있는 사무실이지만 이 닭장 같은 곳에서 하루에 수천만원에서 억대가 매일 거래되고 있습니다. 물건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선물시장같이 전화로 거래하는 것입니다. 물론 능역있는 사람이 운영하는 닭장인경우입니다.
제가 돈 벌 운때가 됐는지, 당시 경기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형에게서 처음에는 돈 받는 심부름부터 전화받는 일을 하게 되면서 얼마나 장사가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스개 소리로 전화받느라 소변보로 갈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이 그 상황과 맞다고 생각합니다.
돈 참 많이 벌었습니다. 쉬는날이 있으면 아쉬울정도로 마이 벌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에 그저 푹 빠져 지냈어요. 궁굼해 하실 분이 있어 부기하면, 전 처는 이때 정신과 치료 중단하고 의류샆을 열게 됩니다. 여유있는 돈이 모든것을 해결해 주더이다. 물론 주말부부 정리되고 다시 한 가족이 되어 그렁저렁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 후 이혼하게 된 가족의 얘기를 하자면 다시 한편의 드라마가 되는데요 그건 생략하겠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풍족함을 느끼면 그 다음에 생각하는것이 문화라고 하더이다.
어느 날 거래처와 술한잔 하고 입가심이라고 한잔 더 하는 문화가 있던 때, 당시 유행하던 극장식 술집을 갔습니다. 왼 녀석이 막대기 하나 들고 삿갓쓰고 나와 밴드 연주에 맞춰 한오백년을 불르더니 간주는 그 막대기 같은 것으로 연주하는데요... 그 소리에 뿅 간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지요. 웨이타를 부러 저게 무슨 악기냐고 물었더니, 대금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대금사고 책사고 배우기 시작한것이 지금의 저입니다.
이때 지금의 전처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금에 심취할 수 밖에 없던것이 아마도 당시 괴로운 모든 상황을 대금으로 달랬던 이유임이 확실합니다.
사업은 잘 되고 세상 부러울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 인생이 이마이 이루었다 뿌듯했고요, 그리고 이런 모습이 끝가지 갈 줄 알았어요.
96년에 형이 고혈압으로 쓰러집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합니다. 97년에 다시 또 쓰러졌어요.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물좋고 공기좋은 곳을 알아본 것이 지금 제가 사는 소리마당펜션입니다.
형을 지금의 소리마당으로 보내고 혼자 사업을 꾸려나가는데, I.M.F 라는 것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국제금융위기인가요? 피부로 느끼기에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98년도부터 모든 거래처가 어려워 하며 하나 둘씩 잠적해 가기 시작합니다. 다 망한것이지요. 하루밤 자고 나면 몇천만원씩 떼 먹고 잠적하는 이들,, 또는 그냥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이들..
이혼후 2년째가 되었을까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지요.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때만해도 절대 평생 고생 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요.... 온 나라가 그토록 엉망이 되고 뒤죽박죽 될줄은 몰랐어요.
6,7년 착실히 키워 나가던 저희 사업도 이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장부상에 있는 미수금 액수는 다 허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살아 남을 수 있던것은 , 시장에 나가 장사를 배운 첫번째 계명이 '한국의 2대 명절 , 즉 추석과 설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고 , 빚을 내서라도 거래처에 미지급금을 남기지 마라'라고 가르쳤던 시장선배들의 말을 그대로 지킨것입니다. 누구나 돈이 필요한 큰 명절에 돈으로 상처 주지 말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싾은 신용이 돈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한 얘기라고 생각듭니다.
시장 원사 도매 장사를 접으며 떠날 때, 미지급금 제로, 미수금은 다 허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쓰는 핸드폰 번호가 21년째입니다. 물론 011에서 010으로 바꾸긴 했지만 당시의 번호 011로 전화해도 다 트랜스퍼 되고 있지요.
그후에 다른 사업을 했지만 경험없는 곳에 뛰어들어 반년만에 간단히 일억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취미로 계속하던 대금을 전공으로 바꿨습니다. 늦깍기 학생으로 대학교도 가고, 또 큰 선생을 찾아 다니며 배웠습니다.
2001년 소리마당이라는 단체를 설립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한푼 돈 되지 않는 국악에 미련이 있어 이러고 있습니다.
무응치비법이라는 금강경에 나오는 성어입니다. 원글은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입니다.
의역하자면 원래는 없던것이다.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또 없으면 어떠냐 라는 뜻이라고 스님께서 일러 주었습니다.
제 새로 차린 연습실에 떠~하니 걸려있는 액자입니다.
수년전 제자 중 한 사람이 스님이 계셨는데, 느닷없이 저에게 9인승 봉고차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안면도에 암자를 갖고 있는 그 스님을 기억하고 우연히 지나는 길에 주신다는 봉고차를 인수?하러 갔지요.
제가 이리 참 멍청하고 순진한 무지랭이 입니다. 달랑 그 말 한마디에 사전 통보 없이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봉고차에 대해선 아무말도 안 하시는 스님과, 달리 또 할 말도 없어 암자에 걸린 현판에 쓰인 글이 궁굼해서 '저 글이 무슨 뜻인가요?' 물어본것이 위의 답변이었습니다.
걍 올라오는 길에서 스스로 웃었습니다. 참 어리석도다.. 참 바보 같도다... 또 웃었더이다.
요즘엔 연습실에 떠하니 걸려있는 그 글귀를 보고 또 슬며시 웃곤합니다. 봉고차가 아니라 제 인생에 대해서입니다. 맞는 말이로다...
오늘 온 종일 비 오더니 어스름 저녁무렵부터 비가 그치더니 귀뚜라미 소리만 가득한 밤입니다.
그리고 , 우리 독도 잘 있습니다.
아리는 여전히 천방지축입니다.
늦동이가 아직 어렸을 적에 지금과 같이 둘만 호주로 여행 간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인도로 가고싶으니 나중에 혼자 가겠다고 한것이 지금껏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가지 못한것이 아니라 가지 못하게 하는 집사람때문입니다. 제가 역마살이 있어서 가면 안 온다나 우쨌다나.. 이유는 그거 하나입니다. 뉘랑 같이 가면 보내주겠다고 하는데..아직 그 짝을 몬 만났습니다. 인도로 해서 티벳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달랑 하나입니다. 다녀온 제자의 말인즉슨, 사람 사는 냄새가 아주 재미가 있다고 하더군요. 오고 싶지 않더랍니다. 히피족이 인도의 사상을 흉내낸 이들이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저 막연히 그곳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것이죠.
어쨋든 시작한 얘기거리 마칠라고 합니다. 너무 지루한것 같아 짧게 끝낼랍니다.
시장 도매라는 것이 일반인들은 잘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정식으로 내 비춰진 시장이 아니라 음지에서 거래하는 시장이지요. 겉으로 보기엔 가로세로 2미터 * 2미터 의 작은 점포같은 칸막이 사무실에, 책상하나와 추가 인테리어 없고, 견본 몇개 걸려있으며, 달랑 전화 두어대 있는 사무실이지만 이 닭장 같은 곳에서 하루에 수천만원에서 억대가 매일 거래되고 있습니다. 물건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선물시장같이 전화로 거래하는 것입니다. 물론 능역있는 사람이 운영하는 닭장인경우입니다.
제가 돈 벌 운때가 됐는지, 당시 경기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형에게서 처음에는 돈 받는 심부름부터 전화받는 일을 하게 되면서 얼마나 장사가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스개 소리로 전화받느라 소변보로 갈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이 그 상황과 맞다고 생각합니다.
돈 참 많이 벌었습니다. 쉬는날이 있으면 아쉬울정도로 마이 벌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에 그저 푹 빠져 지냈어요. 궁굼해 하실 분이 있어 부기하면, 전 처는 이때 정신과 치료 중단하고 의류샆을 열게 됩니다. 여유있는 돈이 모든것을 해결해 주더이다. 물론 주말부부 정리되고 다시 한 가족이 되어 그렁저렁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 후 이혼하게 된 가족의 얘기를 하자면 다시 한편의 드라마가 되는데요 그건 생략하겠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풍족함을 느끼면 그 다음에 생각하는것이 문화라고 하더이다.
어느 날 거래처와 술한잔 하고 입가심이라고 한잔 더 하는 문화가 있던 때, 당시 유행하던 극장식 술집을 갔습니다. 왼 녀석이 막대기 하나 들고 삿갓쓰고 나와 밴드 연주에 맞춰 한오백년을 불르더니 간주는 그 막대기 같은 것으로 연주하는데요... 그 소리에 뿅 간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았지요. 웨이타를 부러 저게 무슨 악기냐고 물었더니, 대금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날 대금사고 책사고 배우기 시작한것이 지금의 저입니다.
이때 지금의 전처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금에 심취할 수 밖에 없던것이 아마도 당시 괴로운 모든 상황을 대금으로 달랬던 이유임이 확실합니다.
사업은 잘 되고 세상 부러울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 인생이 이마이 이루었다 뿌듯했고요, 그리고 이런 모습이 끝가지 갈 줄 알았어요.
96년에 형이 고혈압으로 쓰러집니다. 그리고 다시 재기합니다. 97년에 다시 또 쓰러졌어요.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물좋고 공기좋은 곳을 알아본 것이 지금 제가 사는 소리마당펜션입니다.
형을 지금의 소리마당으로 보내고 혼자 사업을 꾸려나가는데, I.M.F 라는 것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국제금융위기인가요? 피부로 느끼기에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98년도부터 모든 거래처가 어려워 하며 하나 둘씩 잠적해 가기 시작합니다. 다 망한것이지요. 하루밤 자고 나면 몇천만원씩 떼 먹고 잠적하는 이들,, 또는 그냥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이들..
이혼후 2년째가 되었을까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지요.
지금의 아내를 만났을때만해도 절대 평생 고생 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요.... 온 나라가 그토록 엉망이 되고 뒤죽박죽 될줄은 몰랐어요.
6,7년 착실히 키워 나가던 저희 사업도 이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장부상에 있는 미수금 액수는 다 허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 살아 남을 수 있던것은 , 시장에 나가 장사를 배운 첫번째 계명이 '한국의 2대 명절 , 즉 추석과 설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고 , 빚을 내서라도 거래처에 미지급금을 남기지 마라'라고 가르쳤던 시장선배들의 말을 그대로 지킨것입니다. 누구나 돈이 필요한 큰 명절에 돈으로 상처 주지 말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싾은 신용이 돈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한 얘기라고 생각듭니다.
시장 원사 도매 장사를 접으며 떠날 때, 미지급금 제로, 미수금은 다 허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쓰는 핸드폰 번호가 21년째입니다. 물론 011에서 010으로 바꾸긴 했지만 당시의 번호 011로 전화해도 다 트랜스퍼 되고 있지요.
그후에 다른 사업을 했지만 경험없는 곳에 뛰어들어 반년만에 간단히 일억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취미로 계속하던 대금을 전공으로 바꿨습니다. 늦깍기 학생으로 대학교도 가고, 또 큰 선생을 찾아 다니며 배웠습니다.
2001년 소리마당이라는 단체를 설립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한푼 돈 되지 않는 국악에 미련이 있어 이러고 있습니다.
무응치비법이라는 금강경에 나오는 성어입니다. 원글은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입니다.
의역하자면 원래는 없던것이다.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또 없으면 어떠냐 라는 뜻이라고 스님께서 일러 주었습니다.
제 새로 차린 연습실에 떠~하니 걸려있는 액자입니다.
수년전 제자 중 한 사람이 스님이 계셨는데, 느닷없이 저에게 9인승 봉고차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안면도에 암자를 갖고 있는 그 스님을 기억하고 우연히 지나는 길에 주신다는 봉고차를 인수?하러 갔지요.
제가 이리 참 멍청하고 순진한 무지랭이 입니다. 달랑 그 말 한마디에 사전 통보 없이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봉고차에 대해선 아무말도 안 하시는 스님과, 달리 또 할 말도 없어 암자에 걸린 현판에 쓰인 글이 궁굼해서 '저 글이 무슨 뜻인가요?' 물어본것이 위의 답변이었습니다.
걍 올라오는 길에서 스스로 웃었습니다. 참 어리석도다.. 참 바보 같도다... 또 웃었더이다.
요즘엔 연습실에 떠하니 걸려있는 그 글귀를 보고 또 슬며시 웃곤합니다. 봉고차가 아니라 제 인생에 대해서입니다. 맞는 말이로다...
오늘 온 종일 비 오더니 어스름 저녁무렵부터 비가 그치더니 귀뚜라미 소리만 가득한 밤입니다.
그리고 , 우리 독도 잘 있습니다.
아리는 여전히 천방지축입니다.
히따나2님의 댓글
아, 정말 그렇군요...불응취비법이라....너무 좋은 뜻이네요..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큰 위로가 되고 한걸음 뒤에서 여유를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소리마당님의 그 타고난 탤런트에 정말 존경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무엇이든 맘만 먹으시면 남보다 오천배는 더 잘하실수 있는 그 능력! 소리마당님 글 읽고 싶어 새벽같이 일어나 이렇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부인과 막둥이 미국여행 즐거우시길 바라구요. 이혼한 얘기도 짬되시면 꼭 들려주세요. 이렇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이야기를 세상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