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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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마당님의 댓글
국악공연하면 으례 떠 올리게 되는 광경이 있습니다. 양악하다 20년 쉬고 다시 십수년 국악에 빠져 있다보니 식상한 것이 바로 국악-행사공연입니다.
민요.. 떼 지어 나와 얼씨구 절씨구 소리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속된 말로 떼창이라고 합니다. 판소리 .. 무슨 내용인지 전달도 안 되는 목 쉰 소리로 긴긴 소리 마냥 해 댑니다. 심청이가 어떤 장면에 있는지는 대략 알겠는데 그 자세한 대사를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사물..그저 한없이 두들겨 패 대 기만 합니다. 어딜가나 어디에서나 다 똑 같이 외워서 똑 같은 순서로 이어지니 ..이젠 감상하기도 지쳤습니다. 사물놀이..김덕수 패가 사물놀이라는 말을 써서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한지 이제 30년 밖에 안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마당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서 행사장이면 꼭 사물놀이가 있지요.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을 준비하며 보여 줄 우리것이 없다!라는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후, 그래도 조금 의식있는 관료들에 의해 우리 것의 발굴과 지원을 하게 된 시점부터 오히려 우리 국악은 거렁뱅이가 되었습니다. 온 나라 문화센터에 온 동네 구석구석에 민요교실, 사물놀이 , 또 온 나라 초교에 단소등이 성황을 이루면서 모두 싸구려 음악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단소?그러면 커리큘럼 또는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학교종이 땡땡땡 부터 시작해서 아리랑이나 도라지 정도하면 다 배운것으로 알고 있고, 본격적으로 전통가락을 배우려는 사람 없습니다. 단소요? 5음계를 연주할 수 있게 제작된 악기는 7음계와 반음계를 소화하는 리코더와 비교가 안 됩니다. 말이 곁가지를 쳤습니다. 이 단소를 싸구려 악기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국악인들입니다. 대학, 대학원 졸업해야 어디 갈데가 없는 현실에서 타 악기 전공자들이 악보는 보겠다, 이론 알겠다, 상식있겠다. 졸업장에 단소전공이라고 써있지 않으니 국악과 졸업장 가지고 용돈 벌기 시작한 곳이 바로 초등학교 국악교실입니다.
악기 하나를 깨우쳐 가르치는 과정에 있으려며 동 악기로 고민과 연습을 수없이 거친 다음에야 가능한것을 우리 국악인들은 그저 잠간 소리내기만 익히고는 '얘들아 높은 소리는 입술을 바짝 조이고 세게 불면된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지도를 한 것이 온 나라 아이들을 망쳐놓게 되었습니다. 제가 양악이론은 대충 알고 있으니, 한 6개월 정도 바이엘 띈 다음 피아노 학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온 동네에 생기고 온 나라 관 산하에 생긴 문화교실-특히 민요교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지요. 그래도 70년대에 캬바레가 성행하던 때에 장바구니 들고 입장하던 아낙네들보다야 훨씬 보기 좋은 여가선용꺼리가 확실합니다. 이제, 지도하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을 세울 무대가 없다보니, 재미있게 배운 민요가락 어디에서 한번 노래 해 봐야 쓰것는데..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무대만 만들어다오..그냥 해 줄께!가 됩니다. 너도 나도 공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관에 있는 사람들이 민요하는 사람들 사례비? 줄 생각도 , 아니 기안 자체에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화장비와 식사비 정도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떼창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시작된것이지요.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두세명하기에도 뉘가 틀렸는지 금새 표시나고..그러니 몽땅-국악에는 화음도 없겠다 그냥 제창으로 가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국악에는 앞소리와 뒷소리 그러니까 선창과 후렴이 있는데 선창은 선생또는 아조 잘하는 이, 또는 다행히 전공자이고 후창은 말할것도 없이 떼창으로 가는 천편일률적인 공연문화가 되었어요.
일제 강점기가 끝나며 우리는 새 세상이 왔다 좋아 했다지만, 우리 문화는 사실 그때부터, 일제때 보다 더한 괄시와 무관심속에 하대를 받아오다, 어느 날 이제사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도리어 범람을 초래하고 드디어는 무참하게 싸구려로 전락하는 세상이 된것입니다. 다 우리의 잘못이지요.
이번 공연은 영주의 지인이 부탁을 해 와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곡목도 제가 선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곡목중 본인이 정해 주었습니다.
모두 관현악곡입니다. 시골 구석 무섬마을에서 이 곡들이 먹힐까? 불안했습니다.
연주일정 또한 여름 휴가기간 중이라 단원중 30%가 빠지게 되고 , 객원을 찾아봐야 했어요.
객원연주자는 통상적으로 악보 미리 주고 일회만 맞추게 되어있는데... 관현악곡을 고작 한번 연습하고 당일에 어중이 떠중이 모여 웃기는 연주가 되지 않을까 고민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객원들이 협조를 잘 해 주어 8월부터 주1회 연습 총 3회 연습하고 갈수있게 되는 조금 나아진 환경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천만 다행인것은 객원연주자 모두 실력있고 의식있는 젊은이들이어서 처음 연습때부터 안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무섬에 다녀왔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왔습니다.
사실...또 지레짐작으로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갔던것이 사실입니다.
항시 왁자지끌하고, 한편에서는 술판에 저 뒤에서는 잡담에.. 낄낄대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먹는소리 술취한 소리..무대 앞으로 수없이 지나 다니는 모습들.. 지인의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떼 지어 퇴장하는 객석응원꾼들, 관객에 대한 마지막 예우인 커튼콜도 생략하기로 서로합의? 보는 국악인들의 스스로 싸구려가 되는 안일한 태도.. 항시 느끼는 - 공연장 무대에서 연주 도중..그냥 이대로 그만하고 내려갈까? 수없이 자신과 싸워왔던 그런 상황을 또 그리며 무섬을 가게 된것이지요.
달이 있어서 달빛에 취해서 그랬을까?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있어서 그랬을까나?
아니면 수 킬로메터 진입로 부터 연주장 언덕빼기까지 빼곡히 들어찬 자가용.. 어차피 지금 일어나야 빼지도 못할것이니 그냥 앉아 있던 것일까나?
시간이 너무 흘러 한 프로를 빼고도 두 시간여를 넘는 공연장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오기 잘 했도다. ..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연주자의 감정을 마음껏 느끼고 왔습니다.
민요.. 떼 지어 나와 얼씨구 절씨구 소리지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속된 말로 떼창이라고 합니다. 판소리 .. 무슨 내용인지 전달도 안 되는 목 쉰 소리로 긴긴 소리 마냥 해 댑니다. 심청이가 어떤 장면에 있는지는 대략 알겠는데 그 자세한 대사를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사물..그저 한없이 두들겨 패 대 기만 합니다. 어딜가나 어디에서나 다 똑 같이 외워서 똑 같은 순서로 이어지니 ..이젠 감상하기도 지쳤습니다. 사물놀이..김덕수 패가 사물놀이라는 말을 써서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한지 이제 30년 밖에 안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전통마당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서 행사장이면 꼭 사물놀이가 있지요.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을 준비하며 보여 줄 우리것이 없다!라는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후, 그래도 조금 의식있는 관료들에 의해 우리 것의 발굴과 지원을 하게 된 시점부터 오히려 우리 국악은 거렁뱅이가 되었습니다. 온 나라 문화센터에 온 동네 구석구석에 민요교실, 사물놀이 , 또 온 나라 초교에 단소등이 성황을 이루면서 모두 싸구려 음악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단소?그러면 커리큘럼 또는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학교종이 땡땡땡 부터 시작해서 아리랑이나 도라지 정도하면 다 배운것으로 알고 있고, 본격적으로 전통가락을 배우려는 사람 없습니다. 단소요? 5음계를 연주할 수 있게 제작된 악기는 7음계와 반음계를 소화하는 리코더와 비교가 안 됩니다. 말이 곁가지를 쳤습니다. 이 단소를 싸구려 악기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국악인들입니다. 대학, 대학원 졸업해야 어디 갈데가 없는 현실에서 타 악기 전공자들이 악보는 보겠다, 이론 알겠다, 상식있겠다. 졸업장에 단소전공이라고 써있지 않으니 국악과 졸업장 가지고 용돈 벌기 시작한 곳이 바로 초등학교 국악교실입니다.
악기 하나를 깨우쳐 가르치는 과정에 있으려며 동 악기로 고민과 연습을 수없이 거친 다음에야 가능한것을 우리 국악인들은 그저 잠간 소리내기만 익히고는 '얘들아 높은 소리는 입술을 바짝 조이고 세게 불면된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지도를 한 것이 온 나라 아이들을 망쳐놓게 되었습니다. 제가 양악이론은 대충 알고 있으니, 한 6개월 정도 바이엘 띈 다음 피아노 학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온 동네에 생기고 온 나라 관 산하에 생긴 문화교실-특히 민요교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지요. 그래도 70년대에 캬바레가 성행하던 때에 장바구니 들고 입장하던 아낙네들보다야 훨씬 보기 좋은 여가선용꺼리가 확실합니다. 이제, 지도하는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을 세울 무대가 없다보니, 재미있게 배운 민요가락 어디에서 한번 노래 해 봐야 쓰것는데..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무대만 만들어다오..그냥 해 줄께!가 됩니다. 너도 나도 공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관에 있는 사람들이 민요하는 사람들 사례비? 줄 생각도 , 아니 기안 자체에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화장비와 식사비 정도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떼창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시작된것이지요.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두세명하기에도 뉘가 틀렸는지 금새 표시나고..그러니 몽땅-국악에는 화음도 없겠다 그냥 제창으로 가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국악에는 앞소리와 뒷소리 그러니까 선창과 후렴이 있는데 선창은 선생또는 아조 잘하는 이, 또는 다행히 전공자이고 후창은 말할것도 없이 떼창으로 가는 천편일률적인 공연문화가 되었어요.
일제 강점기가 끝나며 우리는 새 세상이 왔다 좋아 했다지만, 우리 문화는 사실 그때부터, 일제때 보다 더한 괄시와 무관심속에 하대를 받아오다, 어느 날 이제사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도리어 범람을 초래하고 드디어는 무참하게 싸구려로 전락하는 세상이 된것입니다. 다 우리의 잘못이지요.
이번 공연은 영주의 지인이 부탁을 해 와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곡목도 제가 선정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곡목중 본인이 정해 주었습니다.
모두 관현악곡입니다. 시골 구석 무섬마을에서 이 곡들이 먹힐까? 불안했습니다.
연주일정 또한 여름 휴가기간 중이라 단원중 30%가 빠지게 되고 , 객원을 찾아봐야 했어요.
객원연주자는 통상적으로 악보 미리 주고 일회만 맞추게 되어있는데... 관현악곡을 고작 한번 연습하고 당일에 어중이 떠중이 모여 웃기는 연주가 되지 않을까 고민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객원들이 협조를 잘 해 주어 8월부터 주1회 연습 총 3회 연습하고 갈수있게 되는 조금 나아진 환경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천만 다행인것은 객원연주자 모두 실력있고 의식있는 젊은이들이어서 처음 연습때부터 안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무섬에 다녀왔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왔습니다.
사실...또 지레짐작으로 그런 광경을 상상하고 갔던것이 사실입니다.
항시 왁자지끌하고, 한편에서는 술판에 저 뒤에서는 잡담에.. 낄낄대는 소리 아이 우는 소리, 먹는소리 술취한 소리..무대 앞으로 수없이 지나 다니는 모습들.. 지인의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떼 지어 퇴장하는 객석응원꾼들, 관객에 대한 마지막 예우인 커튼콜도 생략하기로 서로합의? 보는 국악인들의 스스로 싸구려가 되는 안일한 태도.. 항시 느끼는 - 공연장 무대에서 연주 도중..그냥 이대로 그만하고 내려갈까? 수없이 자신과 싸워왔던 그런 상황을 또 그리며 무섬을 가게 된것이지요.
달이 있어서 달빛에 취해서 그랬을까?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있어서 그랬을까나?
아니면 수 킬로메터 진입로 부터 연주장 언덕빼기까지 빼곡히 들어찬 자가용.. 어차피 지금 일어나야 빼지도 못할것이니 그냥 앉아 있던 것일까나?
시간이 너무 흘러 한 프로를 빼고도 두 시간여를 넘는 공연장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오기 잘 했도다. ..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연주자의 감정을 마음껏 느끼고 왔습니다.
소리마당님의 댓글의 댓글
한국의 공연 문화
이젠 기업들도 많이 스폰서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 인천에서 각자 교통비 들여가며 인천 팝 오케 단원들과
잠실 롯데 소속 객원 세션맨들과 2년 가까이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 소속 팝오케스트라를 취지로 열심히도 했는데
노동절이나 연안부두 축제 행사 몇 번으로 끝났습니다
배신감과 초라해지는 울분도 잠시...
부르면 또 달려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즘은 시에서 월급을 주는데도 더러 있다더군요
선배님 연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참으시고
무사히 치루어 셨다니 박수 보내 드립니다~~~
이젠 기업들도 많이 스폰서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전 인천에서 각자 교통비 들여가며 인천 팝 오케 단원들과
잠실 롯데 소속 객원 세션맨들과 2년 가까이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시 소속 팝오케스트라를 취지로 열심히도 했는데
노동절이나 연안부두 축제 행사 몇 번으로 끝났습니다
배신감과 초라해지는 울분도 잠시...
부르면 또 달려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요즘은 시에서 월급을 주는데도 더러 있다더군요
선배님 연주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참으시고
무사히 치루어 셨다니 박수 보내 드립니다~~~
히따나2님의 댓글
아, 소리마당님이 글을 읽으니 저 스스로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국악과(실은 '국악'이라는 깊은 뜻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쓰는지 몰라 부끄럽지만) 또 그 처한 현실에 대해 조금이나마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상상이 갑니다.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는 수긍도 가구요. 평소에 그런 상황을 접하지도 직접 본적도 없어서 전 그냥 막연히 다 그립고 좋다는 생각만 하고 있거든요. 물론 그 뒷쪽에 얽힌 약간 불편한 이야기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요...얘기가 잠깐 삼천포로 빠집니다만 수년전 한국에서 온 어떤 교환교수와 2년여를 가까이 지낸 적이 있는데...그분의 분야가 한국전통 예술이고 저희들이 또 좋아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듣기도 하고 직접 관련자들을 뵙기도 하는 영광이 있었지요...가령 인간문화재가 된다든지 아니면 텔레비젼 출연같은 것으로 유명해진다든지(그래서 경제적으로 성공을 하는) 하는 과정이 단순히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좀 먼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뭐 어느 분야든 그게 필연적이라면 할수 없겠지만 그후 왜그런지 인간문화재이신 분들을 대하게 되어도 제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게 되어버려서 그런지 예전과 좀 다른 느낌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히따나2님의 댓글
국악을(국악이나 다른 모든 예술도 그렇지만)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연을 접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저도 좀 그렇네요...사실 비싼 티켓을 주고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의 오케나 다른 공연을 볼때는 꼬리내리고(ㅎㅎ) 조용히 문화인으로(아님 문화인인척 하는건가여?) 보면서 왜 우리문화에 대한 태도는 그런지요. 솔직히 일본의 가부끼나 중국의 경극에(ㅋㅋ 제가 가서 본것이 대표적 두가지뿐이라서요) 가도 관중들은 아주 예의바르고 흐트러지지 않잖아요. 하지만 소리마당님 같으신 분들이 계시는 걸 보면 너무 안심이 됩니다. 오늘 하루종일 소리마당님의 글 곰곰히 새기고 생각하게 될것 같아요. 마음을 다해 쓰신 글 제가 소리마당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할수 있길 바라요...정말 가슴이 뭉클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