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편지 - 쉽게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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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갰는데, 비 개인 아침은 맑고 투명하기 그지 없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삶은 달걀과 함께 도시락을 싸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매번 도시락을 쌀 때마다 어떤 도시락을 만들까 고민이 되지만,
저녁에 미리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정해 놓기에, 아침이 그리 바쁘지는 않습니다.
주 메뉴는 샌드위치, 삼각김밥, 김밥, 볶음밥, 덮밥..등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을 위한 도시락을 싸본 기억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별한 날에만 도시락을 쌌었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 도시락을 싸면서 살았습니다.
어쩌다 늦게 일어나면 학교 매점에서 사먹게 했었지만, 일 년에 서너번이었을 겁니다.
동전 하나도 아쉬운 생활이었기에 학교 매점에서 사 먹는 다는 건 사치였었으니까요.
이곳 사람들 역시 직장인들까지도 도시 한복판의 벤취나 공원의 잔디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에
어디에서건 도시락을 펴들고 점심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습관은 지금까지 지속이 되어 언제든 도시락을 꼭꼭 챙기게 됩니다.
헐리데이 가족여행을 갈 때도, 도시락과 과일, 통조림, 과자, 식기류와 버너를 챙겨서 갑니다.
레스토랑에서 기다리다 먹는 것보다 우리끼리 식사를 장만하여 먹는 재미를 더 즐기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도시락을 싸다 보니, 웬만한 셀러드 소스나 요쿠르트 마요네즈등은 집에서 만들어 먹게 되더군요.
가족이 함께 모여서 쿠키를 만드는 재미도 알게 되었습니다.
식빵을 비롯한 이스트빵들로부터 떡 머핀 케이크 푸딩 파이 피자들까지 시도를 하게 되어,
기본적인 식재료들 말고, 공장이나 레스토랑에서 만드는 제품들은 거의 사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음식을 우리가 만들어 먹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농사는 직접 짓지를 못하고 있네요.
오랫동안 도시생활을 하다가 와서 그런지, 성격 탓인지, 흙을 잘 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을 하다가 뉴질랜드로 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처럼 정원 구석에 텃밭을 가꾸고 있기에,
우리도 시도를 해보았지만, 모두들 잘 키우고 있는 깻잎마저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바람이 거센 언덕 위에 위치한 텃밭 탓만 해댔습니다.
아직은 흙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흙을 알게 되기 전까지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일궈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흙이 가르쳐주는 것이 참 많다고 들었지만, 아직은 마음이 흙을 두려워하고 있는듯 합니다.
흙이야말로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며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존재인데,
흙이 주는 혜택을 왜 제대로 받을 엄두를 못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흙을 그리워해서 흙을 밟고 싶어했으면서, 막상 흙을 일구려니 두렵고 힘든 마음이 왜 이렇게 앞서는지 모르겠습니다.
엊저녁에 큰 아이가 학교에 과제로 낼 애니를 좀 봐달라고 하였습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공익광고 애니인데 참 잘했더라고요.
앞으로 반이 더 남았는데,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일어나는 부분부터 해야 하기에,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게 남았구나." 했더니, "뭐 쉽게 생각하고 해야지." 그러더군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 하면서 내 머리를 탁 쳤습니다.
"맞아! 쉽게 생각해야지."
밤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는 과제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한테 다가가니, 마지막 작업을 마치고 있었습니다.
미친듯이 했다면서 시간에 비해서는 잘 나온 거 같다고 하더군요.
도시락을 챙겨 넣는 아이의 모습에서 빛나는 광채를 느꼈습니다.
그동안 내가 어렵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짜 어려운 것들도 있었지만, 귀찮은 거, 하기 싫은 것을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었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로부터 도망갈 구실을 만들어낸 것이었지요.
정원에 무성한 잡초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잡초들을 뽑아야 작물을 제대로 할텐데, 뽑아도 뽑아도 올라오는 잡초들이 짜증나고 싫었습니다.
그래서 텃밭가꾸기가 어렵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던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쉽게 쉽게 뿌리를 내리는 잡초와의 전쟁에서 늘 진 이유는,
어려워서 진 게 아니라 귀찮은 것을 어렵다고 생각해 버린 탓이더라고요.
밤새 내린 빗물 덕에 잡초들이 빗물을 머금고 웃고 있습니다.
나도 잡초를 보면서 웃었습니다.
부드러워진 땅에서 쉽게 뽑힐 잡초를 상상하며 든든한 식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